부제: 늑대와 페릿.
크라나간 공원.
오전에는 아침 산보를 하러 온 사람들의 공간으로, 오후에는 휴식을 취할 곳을 찾아 온 사람들의 쉼터로, 저녁에는 연인들의 공간으로 바뀌는 이곳은 그 역할만큼이나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다. 하지만 때는 여름. 그것도 불볕더위가 한창인 낮 시간 때라, 공원엔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원래 나무가 많은 공원은 좋은 피서지이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피서 온 사람이 없다. 열대야가 기승일 밤이나 되어야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원 벤치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덥다.
시멘트 바닥이 괴로운 듯 축 늘어져있고, 심어논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런 날을 덥다고 하지 않으면 언제를 덥다고 하겠나. 여기 있기를 벌써 한 시간. 알프가 말한 시간까지 앞으로 4시간이나 더 남았다.
“유노! 햇볕을 못 쬐니까 그렇게 우울해보이는거야! 크라나간이나 가서 오늘 저녁까지는 서고로 오지 마!”
알프의 그 명령 아닌 명령에 얼떨결에 알았다고 대답한 나는, 지금 공원에 있다.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한다든지 먹자골목에 가서 음식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지갑을 챙기지 않아 돈 없이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공원으로 온 것이다.
모든 기록이 책의 형태로 기록되는 무한 서고는 책의 오랜 보존을 위해 자연 채광이 되지 않는다. 책의 보존을 위해 일 년 내내 습도와 기온이 일정하며 햇빛이 비춰지지 않는 곳. 우리 무한서고 사서들은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가끔 광부들이 잘 걸린다는 비타민 D결핍에 걸리기도 한다.
그냥 주사 한방 맞으면 되는데.
이곳은 모든 마도문명의 중심지인 크라나간이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는 곳은 그 마도문명의 정수인 관리국이다. 중병은 몰라도 비타민 D 결핍 정도라면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 건강을 도외시하는 게 나쁜 짓인 건 알지만, 알프 이 땡볕에 바깥으로 내모는 것도 충분히 나쁜 짓이라고. 언제부터인지 내 비서처럼 되어버린 작은 소녀에게 불평해본다.
언제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은 오늘 하루쯤 쉬어도 되건만 본업에 충실하고 있고 지표면에 충만한 수증기는 열기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다. 그늘에 앉아 있는데도 습기 때문에 시원하지가 않다.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 나온 건데, 햇빛에 그만 익사해버릴 것 같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작게 한숨을 쉬어본다. 평소와 달리 알프가 날 밖으로 내몬 건 아마 그 일 때문이겠지.
“사, 사서장님!”
신입사서 하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찾아왔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신입사서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내용인즉슨, 메일로 보내졌어야할 자료가 어찌된 영문인지 보내지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신입사서는 방심하고 확인하지 않았고 그 자료를 못 받은 부서는 그 자료의 미발송으로 인한 준비 불충분으로 국원 몇 명이 작전 수행 중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알았어. 그럼 내가 사과하러가지.”
“아닙니다! 제 실수인데 당연히 제가 가야죠!”
“그 정도로 큰일이면 자네가 가서 해결될 일이 아니야. 내가 직접가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에게 하지 말고 다친 국원들에게 가서해. 난 그 부서로 가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신입사서는 큰 짐을 던 듯 한결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사고를 당한 부서의 보스는 무한서고 사서들을 그리 좋지 않게 보는 이로 유명한 사람이라, 사과하러가기 무서웠던 모양이다. 뭐, 사서들을 좋게 보고 있더라도 그런 사건을 당하면 무지 화가 나겠지만. 나는 무한서고를 뒤로 하고 문제의 부서로 찾아갔다. 내가 할 일은 한 집단의 수장으로서의 사과.
부서로 찾아가자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 방으로 안내했다. 쇼파에 앉아 싸구려 티백을 우려낸 차를 받고 조금 기다리자, 40대 후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화를 길길이 내며 내 멱살부터 잡을 줄 알았건만, 남자는 의연한 얼굴로 맞은편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침묵. 예상치 못한 반응들의 연쇄에 혼란해하는 사이 남자가 말을 꺼냈다.
“내가 요즘 고민 하나를 가지고 있네.”
남자는 진심으로 고민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떤 겁니까?”
“얼마 전에 내 집 마당에 두더지 새끼 한 마리가 들어왔었는데 말이야.”
꿈틀. 찻잔을 집던 내 손이 일순간 멈추었다. 두더지. 그건 햇빛과의 접촉이 적은 우리 사서들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물론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쓸 때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알기에 내 앞에서 쓰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 거였나.
분노가 담긴 시선을 느낀 남자는 비릿하게 웃었다. 참아야한다. 여기서 내가 흥분해서 일어난다면, 남자는 사과로 끝날 수 있는 이번 문제를 정식으로 항의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사서장이 이 부서에 악감정이 있어서 일부로 그랬다’는 식으로 말이다. 또 그러지 못하더라도 남자는 나를 화나게 했다는 것으로도 상당한 소득이라며 좋아할 것이다. 참아내야한다. 애써 두꺼운 가면을 써서 솟아오르려는 분노를 가렸다.
“바깥에서 주인 허락도 안 받고 들어 온 주제에 말이야. 수를 점점 늘리더니 이제는 제법 주인행세를 하려하지하더군. 하지만 나는 원래 너그러운 사람이고 두더지들이 내 밭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니 조금 못마땅하긴 하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네. 그런데 말이야, 그 녀석들이 파놓은 구멍에 내 아들 놈이 다쳤지뭔가. 그래서 말인데 이 녀석들을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네.”
다시 한 번 짓는 비릿한 웃음. 그 모습이 마치 매미 날개에 불을 붙이고는 매미가 어떻게 할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악동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목언 저리까지 욕지거리가 쳐 올라왔지만, 다행히 차갑고 두꺼운 가면에 막혀 결국 올라오지 못했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닐 테니 한번정도는 눈감아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 아들놈이 다쳤는데도?”
“그건 유감이지만, 두더지도 제가 잘못한 걸 알고 반성하고 있을 겁니다.”
내 입으로 두더지란 말을 꺼내니 수세미를 삼킨 듯 심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애써 참아내며 말했다.
“흠~,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번정도는 봐줘야겠군. 나도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남자는 마치 해적두목처럼 크게 웃었다. 그 모습에 순간 주먹이 쥐여졌으나, 내가 지금 이순간만 참는다면 사태가 원만하게 돌아갈 것을 알았기에 계속해서 인내심을 발휘해야했다. 그렇게 참고 있으니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 여기 온 용무는 끝났나?”
“네. 이만 돌아가봐야겠습니다.”
미지근해진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일어나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잘 가게. 그리고 말이야. 하나는 명심해두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두더지가 아무리 열심히 땅을 판다한들 하늘에는 닿지 못한다는 걸 말이야.”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입사서가 자료를 보내기로 한 메일주소를 몇 시간 전에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니 메일이 보내지지 않고 반송될 수밖에. 거세게 항의하러 가고 싶었지만 피해를 입은 건 사서들이 아니라 무장국원이었고, 곧 사과공문이 왔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노린 거였겠지.
피차실수였다면 저쪽에서 확인하고 연락할 수 있었다. 보냈어야할 자료는 임무 수행 중에 보는 게 아니라 사전에 숙지해 놓았어야하는 자료였으니까. 젊은 나이에 한 기관의 장이 된다는 것은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특히 기득권층으로 갈수록 질투와 시기의 강도는 더욱더 세지게 된다. 남자도 그 중 하나였겠지.
“빌어먹을”
하지만 그렇다고 국원을 희생시키다니. 물론 남자도 자료 불충분으로 국원들이 부상당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임무 지장을 초례하는 정도였더라도 엄중히 항의한다면 사서장이 직접 와서 사과할 수 있다. 그러면 미리 준비한 말을 꺼낸다. 그게 남자의 애초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상 일을 완전히 염두 안하진 않았을 터, 그런대도 이런 계획을 실행해야 했을까. 겨우 나 하나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 수명의 국원들을 희생시켜야 했을까. 머릿속으론 이해되지만, 납득되지는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그 일이 있은 후 무한서고에 돌아와서도, 또 사태의 전모를 알게 된 후에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속이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고로, 티를 안내려고 했는데.
“요즘 무슨 일 있어?”
알프는 속이지 못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도 얼굴에 그늘졌다며 알프는 늑대답게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계속 물고 놓아주지 않자, 결국 그 일을 말해버렸다. 약간은 슬픈 듯이 그리고 조금 분한 듯이. 알프는 그렇게 말하는 날 보며 슬픈 듯이 그리고 분한 듯이 들어 주었다.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아직 한낮이라 공원엔 여전히 사람이 없고 그 자리엔 햇빛만이 가득 채우고 있다.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기엔 땅에 떨어진 송충이 한 마리가 있었다.
땅에 떨어진 지 시간이 꽤 경과했기 때문일까.
송충이는 본연의 푸르름을 잃어버리고 누렇게 변색되어있었다. 죽어가는 송충이.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낸들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송충이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듯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하지만 단 1mm도 전진하지 못하는 송충이. 말 그대로 송충이는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렇게 보고 있기를 5분. 어디선가 나타난 개미 한 마리가 송충이에게 접근했다. 더듬이와 발로 송충이가 먹을 수 있는 건지 확인한 개미는 송충이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목숨이 얼마 안남은 송충이를 기다려주는 배려심을 발휘해주면 좋으련만, 개미는 그런 건 모른다는 듯 무거운 송충이를 끌기위해 용을 쓰고 있다. 아직 송충이는 살아있는데도. 삶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도.
도시는 미물마저도 이기적인가.
문득 사막이 그리워졌다. 생살을 조금씩 익게 하는 열기가, 건조한 열기에 같이 묻어오는 모래바람이 그리워졌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이 그리워졌다. 파도 파도,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던 유적들이 그리워졌다. 옛날이, 옛날이 그리워졌다.
사막으로 가자. 그래 사막으로 가자.
일단 결심을 하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인사과에 가서 밀린 유급 휴가 신청을 냈고 쉽게 승인을 받았다. ( 서류를 건네주던 직원이 손을 떨며 ‘제 생애 이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한 건 넘어가기로 하자. ) 내 밑에 직속 사서 6명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 사서들이 ‘사, 사서장님 절대 3일을 넘기시면 안 됩니다.’라고 울면서 말한 것도 넘어가자. ) 짐을 싸서 전송포트로 향했다. ( 왜 기숙사 앞에 기자들이 몰려있는 건지 모르지만 휩쓸리기 싫어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는 것은 비밀로 하자. )
부산한 전송포트.
차원과 차원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라, 전송포트는 여러 차원에서 온 사람들로 부산했다.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웃으면 헤어지는 가족들. 성공적인 계약체결을 위해 무덤덤하게 인사하고는 헤어지는 사워들 세상이 멸망할 듯 울면서 헤어지는 연인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 사전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언질했기 때문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난 단지 가기만 하면……
“뭘 그리 멍하게 서 있는 거야.”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생각에 빠져있던 정신이 현실로 급부상한다. 누구? 급하게 뒤돌아보았다.
“알프.”
뒤를 돌아보니 유아체형의 사역마. 알프가 있었다.
“여기서 뭘 멍하게 서 있는 거야.”
알프는 질책하듯이, 약간 언성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
난 갑작스러운 알프의 등장에 어리둥절해했다.
“난 여기 오면 안되는거야?”
“그건 아니지만……”
“자!”
알프는 뒤에 감춰두었던 보따리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이건?”
“도시락이야. 도시락”
알프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말했다.
“고, 고마워.”
난 어떨떨한 기분으로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
“가서 밥 굶지 말고 이거라도 먹어.”
“고마워, 잘 먹을게.”
상당한 무게. 만들려면 시간 좀 걸렸을 텐데.
“그리고 유노……”
알프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듯한 시선으로 내손을 잡았다.
“응?”
“그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손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을 놓으면 급류에 휩쓸리기라도 할 것 같은지 놓아주지 않는다. 알프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노력해볼게.”
나직이. 걱정되지 않도록 되도록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됐어. 잘 갔다 와!”
난 알프의 배웅을 받으며 전송포트로 향했다.
전송 포트를 나와서 본 것은 끝도 없는 모래 언덕이 아니라, 그리운 천막촌이었다. 그리운 천막촌. 방랑 민족이지만 고고학을 업으로 살아가기에 연락과 타차원 이동을 위해 항시 간이 전송 포트를 설치해놓는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10년이 지났음에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천막촌을 보며 내가 정말 고향에 왔음을 실감했다.
그리운 천막촌을 둘러보고 있으니 전송포트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맨 먼저 나타난 것은 아이들. 마력 광이 보이자마자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걸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조금 기다리자 익숙한 얼굴 몇몇이 보이기 시작한다. 부족장님은 왜 안보이시지.
“유노님이시죠?”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한 여인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누구지. 분명히 기억에 있는 사람인데 안개에 가린 것처럼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윤기 나는 흑발을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묶었다. 지적여 보이지만 세련되 보이진 않는 인상. 상당히 성깔도 있어보여 반장 같은 거 시켜주면 잘할 사람처럼 보인다. 정, 정말 누구지?
“부족장님이 기다리십니다. 따라오시지요.”
더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부족장님의 기다리시는 곳으로 향하려고 한다.
“자, 잠깐만요!”
“무슨 일이시죠?”
“저기 혹시 저랑 아는 사이던가요?”
“…………, 네 아주 잘 아는 사이였지요.”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런 반응이라는 건 분명히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데. 여자는 다소 실망한 듯 날 쳐다본다. 약간이지만 원망도 느껴진다.
“자, 저기”
“시간이 없으신 것 같으니 빨리 가겠습니다. 유노 스크라이어님.”
여인은 말끝에 님자를 강조한 다음 내 말을 무시한 채 뒤로 돌아 다시 부족장님이 계신 곳으로 향했다.
“여기입니다.”
여인이 걷어준 천막 문을 통해 천막으로 들어가자 여자는 잡고 있던 천을 놓았다. 같이 들어가는 건지 알았는데, 나만 들어가는 거였나. 천막 안은 외풍을 막기 위해 사방이 막혀있음에도 여기저기 켜둔 조명으로 인해 상당히 밝았다.
“오랜만이로구나.”
주위보다 높아 보이는 곳. 동물의 가죽이 여러 겹 쌓여있고 의자가 놓여 있는 곳. 그 곳에 마을을 지키는 석상처럼 부족장님이 앉아 계셨다.
“오랜만입니다. 부족장님.”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부족장님을 바라보았다. 고귀하지도 그렇다고 비천해보이지도 않는 얼굴. 마치 모든 세월의 풍상을 그대로 겪은 유적과도 같아 보인다. 곁에 있으면 무엇보다도 안심이 되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성벽과 같은 분위기. 10년이 지났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신 게 없어, 마치 지금 내가 10년 전으로 타입슬립해 온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든다.
“많이 컸구나.”
10년 전보다는 노쇠해지신 목소리가 이곳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한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강산을 한번 바꾸기도 하지만 소년을 청년으로 바꿔주니까요. 그동안 자주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자각은 있나 보구나. 그래 무슨 일로 온게냐?”
“고향이 갑자기 그리워져서요.”
“젊은 놈이 향수라……, 일이 적성에 안 맞더냐?”
부족장님의 눈과 마주친다. 흑암 속 맹수의 그것과 같은 눈. 천적을 만난 동물처럼 가슴이 철렁인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변하지 않으신 건 외모만이 아니신 것인가. 10년 전 조손지간처럼 편하게 지내다가도 저 눈만 마주치면, 있는 잘못 없는 잘못 다 말해야했다. 저 눈을 버티지 못한 내 자신을 원망해보았지만, 이미 꺼낸 말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면 일 그만두고 와서 부족 일이나 도우도록 하거라.”
원하는 대답을 얻으셨기 때문인지, 부족장님의 눈이 다시 자상하게 변한다. 공기마저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어디 적성에 맞는 일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좀 고되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었을 뿐입니다. 조금 휴식을 취하고 돌아가면 다시 좋아지겠지요.”
“정말이냐?”
정말일까.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는데 다시 좋아질까.
“…………, 네.”
내 자신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확신이 서지 않는 목소리.
“아쉽게 되었구나. 네녀석이 돌아오면 나도 이만 이 자리를 물러나려고 했는데.”
“네? 지금 무슨?”
“부족장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다.”
“전……, 그럴 그릇이 못 됩니다.”
부족장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면서도 확실하게 거절한다.
“그릇이 어디 처음부터 존재하더냐. 이리저리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리고 그 중에 깨지는 것들이 부지기수지요.”
“내가 깨질 그릇과 못 깨질 그릇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더냐?”
, “…………”
리더의 자리가 힘들어 도망쳐 나온 놈입니다. 그럴 그릇이 못 된단 말입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울컥울컥 쌓여있는 것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기에 가까스로 참았다.
“부족장 자리가 싫더냐.”
“그건 아닙니다. 단지 그럴 그릇이 못 될 뿐입니다.”
“그럼 그 문제는 차후에 거론하기로 하고……”
포기하지 않으신 건가.
“이제 슬슬 가정을 꾸려야하지 않겠느냐?”
“네?”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내 부족 내에서 가장 예쁜 아이로……”
“부족장님!”
“그렇게 큰소리치지 않아도 난 여기 있다.”
“죄송합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크게 당황하고 있다. 부족장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위한 미끼였나.
“아까 그 아이 어떠더냐? 너랑 동문수학한 사이인데, 아직도 널 마음에 두고 있단다.”
“아!”
기억났다. 10년 전에 그 아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나와 비슷한 코스로 공부한 아이. 나보다는 실력이 조금 떨어졌지만, 경쟁심이 강해 금방 내가 공부한 진도까지 따라오곤 했다. 그리고 혼자 넋 놓고 애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때면 어느새 내 옆에 앉아있던 아이였었다.
“설마 누군지 모르고 있었던 게냐.”
“네……”
그 때는 여자라기보다는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가끔 했던 대화로 기억하건데,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했었다. 지금도 기는 세보이지만 저런 숙녀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강산도 바꾸어 놓지만, 소녀를 여인으로 바꾸어놓지.”
부족장님은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따라하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갑작스러운 혼담과 놀라운 사실로 인해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어떠냐.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아직 결혼 생각은 없습니다.”
“몸매가 불만인 게냐. 로브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 저 아이가 부족 내에서도……”
“정말 생각 없습니다.”
“흐음~, 그럼 이 문제도 다음에 이야기 하자꾸나. 다른 볼일 없으면 이만 가봐도 된다.”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처음에 인사했던 것처럼 부족장님에게 인사하고는 천막을 나왔다.
오후 늦게 천막촌을 나와 사막으로 향했다.
부족장님과 대화를 마친 건 오후 2시쯤. 한낮에 사막을 걷는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기에 도시락을 먹고 나서 한낮동안 지인들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안내해준 여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 못하겠네요.’ 라고 말하긴 했으나 내심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계속 사과했다. 왜냐하면 저쪽은 날 기억해주고 있었는데, 난 사과하는 그 순간에도 그 여인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으니까. 기분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것 같자, 마지막으로 미안하다고 한 다음 짐을 싸서 사막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오아시스. 10년이 지났지만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 곳을 목표로 하여 걷기로 했다.
땅거미가 지려고 하지만 발밑에선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오른다. 뭉치고 뭉쳐진 사구를 밟으며 앞으로 전진한다. 지평선 아니, 사평선이라고 불러야 할 것 너머에 있는 태양은 주홍빛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리고 모래는 수분 대신 주홍빛 비명으로 자신의 몸을 흠뿍 적시어 열기에 열기를 더한다. 두꺼운 로브를 입고 있건만 햇빛은 담홍빛 화살이 되어 내 몸을 관통한다.
참으로 혹독한 날씨.
하지만 그렇기에 이곳은 아무 이기심도 개입할 수 없다. 이기심이 섣불리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다간 녹아 없어지고 말테니까. 호흡이 가팔라지자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모래가 섞여 들어오는 건조한 공기. 그러나 도시에서 느꼈던 끈적끈적한 공기가 아니다. 그것을 위안 삼으며 오아시스를 향해 전진했다.
결국 천막촌에서 떠나 4시간 만에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사막의 밤은 그 어느 곳보다 일찍 찾아들기에 이미 도착할 즈음엔 주위는 군청색으로 변해있었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가지고 온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운 다음 간이의자에 앉았다. 4시간동안 쉬지 않고 걸어왔기에 몸은 상당히 피곤에 젖어있다.
앉아서 조용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은 별들. 목에 힘을 푼 다음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라나간이나 여타 도시들에서 볼 수 없었던 별들이 가지각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풀벌레 소리하나 들리지 않기에 모래 식는 소리나 별빛이 반짝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별 하나가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별 하나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별 하나가 보잘 것 없는 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잘 것 없기에, 밤하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것들의 웅대한 오케스트라가 연주된다.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인간은 굳이 힘들여 야구장에 가지 않더라도 이렇게 내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다. 내가 자연에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도시의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매연을 방패삼아 별빛을 가려버린 도시 사람들은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해버렸다. 자신을 다른 어떤 것보다 우위에 두고, 자존감을 확립해버렸다. 그리고 이기적이 되어버렸다.
무엇이 옳은가.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알고 관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자신이 다른 어떠한 개체보다 우위에 서있음을 믿고 삶을 갈구해 나갈 것인가. 천년 제국의 웅장함이 한낮 돌조각으로 변하는 허망함을 알지만 천년 제국의 찬란함 또한 알고 있다.
무엇이 옳은가.
이기적인 사람들이 싫어서 사막이 그리워졌는데, 그 반대가 좋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생각만 복잡해질 뿐. 미리 끓여놨던 물에 커피를 타서 마셨다.
“쓰다.”
내가 탄 거지만 쓰기만 할 뿐 맛이 없었다. 이상하다. 알프는 이런 싸구려 커피로도 맛있게 탔었는데. 문뜩 내 비서처럼 되어버린 소녀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노, 사람은 말이야. 권력의 맛을 알게 되면 늑대가 되버리는 것 같아. 언제나 굶주린 채로 먹이를 물어뜯으려하는 늑대 말이야. 먹이를 당장이라도 먹고 싶지만 내가 먹이를 먹었다간 뒤에 굶주리고 있는 녀석들이 날 물어버릴까 걱정을 해. 그래서 먹기 전에 아래 것들을 먼저 물어 버리지. 아랫것들이 그런 생각을 했건 안했건 하나하나 물고 상처 입히지. 그러는 사이에 이미 먹이는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도 말이야.”
‘그런 동족은 필요 없는데.’라고 말을 마치는 알프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슬퍼보였다.
그런 것일까. 내가 여기서 설령 이기심이란 혐오스러운 것이라도 단정 짓고, 이기심을 다 버리고 가더라도. 다시 돌아간 나는 늑대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분명 그 때 알프에게 웃으며 위로했던 기억이 있는데,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라고 말했더라.……. 멀리서 사막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자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는 여전히 황홀한 오케스트라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땐 더 밤잠이 없었다.
밤이란 부모의 품이 가장 그리워지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고아에게 가장 잔혹한 시간이었으니까. 시리도록 추운 밤이면 몰래 천막을 빠져나와 마을 중앙에 모닥불을 피워 놓은 곳으로 가곤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현재와 미래를 생각했다. 고아로서의 나. 선천적인 조건이 생애에 깊이 관여할 때, 그것의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난 되도록 선천적인 조건, 그러니까 고아라는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려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행동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고아라는 존재가 눈에 띄게 되면 어른들에겐 긍정적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가끔 지나친 동정심에 버거워한 적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기꺼이 받았다. 하지만 문득 가만히 멈추어 서서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을 때면 온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고 불안했으며 두려웠다. 그래서 그런 밤이면 별을 보며 현재의 불행을 말하며 내일의 행복을 노래했다. 별빛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래엔 내 주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많길.
미래엔 내 주위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길.
미래의 나는 행복하길.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노력하고 노력했다.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이렇게 멈추어 생각하니 10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다. 지금 내 주위엔 누런 이를 내밀며 내가 약해지길 기다리고 있는 늑대들이 주위에 있으니까.
잘못 살아 온 걸까. 무언가 놓치고 간 게 있지 않은가. 권력의 이기심에 염증을 느껴 도망 온 것은 사실, 예전부터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건은 기폭제였을 뿐.
미래의 나는 행복하길.
미안하지만 나는 그 바람에 대답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이대로 살아가도 좋은 것일까. 10년 전에 생각한 미래와는 다른 이런 인생을 살아가도 좋은 것일까.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감칠맛 나는 알프의 커피가 그립다.
“그런 동족 필요 없는데.”
최대한 버티어 보지만 눈꺼풀은 추를 단 듯 스르륵 내려간다. 그러면서 슬픈 알프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분명 그 때 난……
“걱정하지마. 다른 사람이 늑대가 되더라도 난 되지 않아. 왜냐하면 난 늑대가 아니라 페릿이니까.”
머릿속에서 울리는 내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점점 심해로 추락했다.
톡.
눈꺼풀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차가운 무언가를 치우려고 손을 눈꺼풀 쪽으로 가져가자, 이번엔 손에 차가운 것이 닿는다. 뭐지. 감겨있던 눈을 뜬다. 어제 커피를 마식 직후에 잠이 들었나. 새벽에 한기 때문에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샤워실 유리처럼 시야가 뿌옇다.
안경이 어디 있지. 떨어진 안경을 찾기 위해 주변을 더듬는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차가운 것들이 몸에 닿는다.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안경을 찾아 황급히 썼다. 그러자 성에낀 유리를 닦아낸 것처럼 시야가 회복되었다.
“눈?”
차가운 것의 정체. 그것은 바로 눈이었다. 말도 안 돼. 사막에 눈이라니. 지금 내가 환몽 속에 있는 것인가. 3만의 병사에 의해 자신의 30만 군대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 왕처럼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뿐히 어께 위로 내려앉는 눈과 새벽의 한기가 지금 이곳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눈사람을 만든 적이 있었다.
스크라이어 부족의 일원으로서 타차원 한대 지방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 얼음 도시.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도시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간 것이었다. 당시 6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애였던 나도 믿지 않은 꿈같은 이야기였는데, 부족장님을 포함한 일족의 어른 분들은 그 일로 심각하게 토론했었다. 나도 부족의 일원으로서 그 토론을 경청하고 있었지만 장시간 회의를 견디지 못하고 회의장을 빠져나와 버렸다. 더 버틸 수도 있었지만,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보다 더 동화 같은 풍경이 천막 밖에 있었으니까.
눈의 사막.
맨 처음 설원을 보며 생각한 단어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고, 봐도 봐도 하나밖에 안 보이는 건 사막밖에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천막에 나오자마자 다소 신기하게 다소 조심스럽게 맨손으로 눈을 만졌다. 한대지방의 눈은 무척이나 차가웠으나 차갑다고 느끼기 보다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점토처럼 만지는 대로 변하는 눈. 점토 같지만 더러워지지도, 촉감이 나쁘지도 않다. 오히려 기분만 좋다.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었다.
주위에 있는 눈을 조금씩 조금씩 뭉치기 시작했다. 손이 새빨개져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정신없이 눈을 뭉쳐대었다. 어느새 눈덩어리가 머리 만해졌고,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같이 만들자.’ 내 것을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도 조금은 들었지만, 5살 아이가 그 이상 크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에 같이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눈을 뭉치자, 세 사람이 뭉칠 크기가 되고.
세 사람이 눈을 뭉치자, 네 사람이 굴릴 크기가 되고,
네 사람이 굴릴 크기가 되자,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눈덩어리를 만들었다.
어느새 눈의 사막은 즐겁게 눈덩어리를 굴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도 누군가 씌워준 장갑으로 눈덩어리를 굴렸다. 결국 내가 맨 처음 만든 눈덩어리는 가장 큰 눈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 보다 더 작은 눈덩어리를 올려놓고 솜씨 좋은 어른들이 장식을 하여 멋진 눈사람이 되었다.
맨 처음엔 단지 더 많은 눈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눈덩어리는 결국 눈사람이 되어버렸다. 가까이서 보는 눈사람은 결코 눈처럼 아름답지 않다. 어디에서 묻은 건지 알 수 없는 검은 때, 잔 나뭇가지, 작은 쓰레기들. 그런 것들이 묻어있는 눈사람은 애초에 바랬던 순수한 눈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무수한 시련과 고난을 겪었기에 눈사람은 아름답다.
인생이란 것도 그런 게 아닐까.
막연히 행복을 바라며 눈을 뭉친다. 처음엔 잘 굴려지지 않아 실망하지만, 이내 잘 굴려지는 눈덩어리를 보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바라지 않았던 것들. 어느새 묻어있는 수많은 오물들을 보며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한다면 눈사람은 만들 수 없다.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눈사람을 감상할 수 없다.
눈사람은 눈이 아니기에 아름답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어 안경을 가린다. 새벽의 추운 날씨와 때마침 모인 먹구름. 혹시 모닥불로 만들어낸 연기까지 더해져 눈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연의 산물. 하지만 그런 우연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잠시나마 이곳을…………
눈의 사막으로 만들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전송포트 앞에서 부족장님에게 인사한다. 어젯밤에 타차원으로 발굴을 위해 대부분의 부족사람들이 갔기 때문에 배웅해주는 사람은 부족장님 외 몇 명뿐.
“볼일은 끝난 게냐.”
“네.”
“다 죽어가던 얼굴이 제법 사내다워졌구나.”
“…………, 역시 고향이 좋긴 좋은 건가 봅니다.”
알고 계셨던 건가. 내 말을 들으신 부족장님은 껄껄 웃으셨다.
“알면 저쪽 일은 때려치우고 돌아오너라.”
“죄송하지만 아직 더 굴려보고 싶어서요.”
“그럼 그러도록 하거라. 하지만 언제라도 고향은 잊지 말아야한다.”
부족장님은 장성한 자식을 보는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살짝이지만 가슴이 뭉클 거린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유념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전송포트가 빛을 발한다. 전송 준비가 다 된 모양이다. 조심히 전송포트 위에 서서 부족장님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부족장님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아 그리고 유노야. 혼담 이야기는 미처 다 못했으니 가면 연락하마.”
“네 그게 무슨?”
부족장님 옆에서 있던 여인이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부족장님도 덩달아 웃으신다. 안, 안 돼! 확실히 거절해놓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마력광이 온 몸을 휘감았다.
플래시 탄처럼 시야를 하얗게 점멸시키는 빛이 사라지자, 보인 것은 관리국 전송포트였다. 느, 늦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시 가서 확실히 거절해야한다. 부족장님이 꺼내신 말을 되돌리신 적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가야한다.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웨딩드레스를 입고 누군가 나타날지 모른다. 다시 전송포트 예약을……
“이제야 돌아온 거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생각 속을 비집고 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프.”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알프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옅은 감색 계열의 가디건에 셔츠.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 설마 새벽부터 기다린 건가.
“갈 때하고 똑같은 얼빠진 얼굴이네.”
“새벽부터 기다린거야?”
여름이지만 전송포트가 있는 곳은 실내. 냉방을 항시 틀어놓기 때문에 새벽엔 상당히 춥다.
“응. 그러면 안돼는 거였어?”
“오늘 안왔으면 어쩔 뻔했어.”
이마에 손을 갔다대고 한숨을 쉰다. 휴가는 2박 3일을 신청했었다. 오늘 안 올 확률이 높은 걸 알았을 텐데. 내가 언제 오는 지 알 수 없으니, 잠도 못자고 전송포트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코끝이 찡해졌다.
“오늘 돌아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래서 기분전환은 잘 하고 온 거야?”
“의욕만땅.”
“잘됐네. 짐 이리 줘.”
가지고 있던 짐 중에 가벼운 짐 몇 개를 알프에게 건넸다. 알프는 짐을 받고는 종종걸음으로 출구로 향했다.
“아, 유노!”
알프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나를 불렀다. 여명과 같은 밝은 미소를 지은 채.
“응?”
“뭐, 잊은 거 없어?”
알프는 눈동자를 살짝 치켜올리고는 추궁하듯 목소리 끝이 올라간다. 잊은 거?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짐은 다 챙겨왔는데. …………, 아!
“다녀왔어.”

“어서와 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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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로 유노를 향해 웃고 있는 알프 일러스트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을 남기며 안녕하십니까. 풍월객입니다.
오랜만에 시리어스 단편으로 찾아뵙게 되었네요. 염장, 개그, 막장. 팬픽에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그 중 시리어스가 가장 읽기 꺼려지게 되지요. 거기다 이번건 무려 30kb... 그래서 중간중간에 텐션 조절을 위한 장치를 몇 개 마련해두었지만, 끝까지 읽는게 어렵지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 뭐 쓰는 전 즐겁기만 했지만요. )
일단 가벼운 이야기부터 하자면.
중간에 나온 스크라이어족 처자는 사실 맨처음엔 계획때는 등장 비율이 꽤 높았었답니다. 그래서 설정도 짜놨었지요. 어린 시절 유노의 친구격 인물. 본인은 유노를 라이벌로 인식하지만, 유노는 그런 식으로 인식하지 않음. 필사적으로 유노를 따라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매번 한템포 느리게 쫒게 되었고, 가까스로 따라잡았다고 생각할즈음엔 이미 유노는 사서장이 되어버려 영원히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유노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취미는 부족 아이들을 위해 테디베어를 만드는 것과 유노 관련 기사 스크랩. 잘 때는 스크랩 파일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잔다. 포니테일이 어울리는 미인.
뭐, 이런 설정 잡아놓고 혼자 하악하악 거렸지만……, 내용 전개상 거의 쓸모가 없고 제 단편 오리지날 캐릭터들이 다 그렇듯 다음에 나올 기약이 없으므로 과감히 컷트컷트컷트 해버렸습니다, ㅡㅜ
아 그리고 이 작품 끝에 보면 알수 있듯이 유알프물이기도 합니다. ( 저, 정말? )
몸도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이라고 3기 시작전 유노와 가장 가까이있는 사람은 역시 알프죠. 그렇기에 유노에게 무언가 이상이 생기면 바로 눈치챌수 있는 사람도 알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이 팬픽을 쓴 거구요. 뭐, 3기 이후에는 나노하도 무한서고 들락날락하고, 비비오양은 사서가 되어서 이젠 확신하여 말할 수 없게되었지만요.
이번 단편의 소재는
권력 투쟁의 염증을 느낀 유노, 그리고 거기에서 느끼는 인생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현 무한서고 사서장 유노 스크라이어이지만. 9세 전의 유노는 절대 자기가 사서장이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0년전 자신이 꿈꾸었던 미래와 현재의 나와의 괴리. 거기서 오는 회의감. 이런 것들을 사용해 팬픽을 써보게 되었습니다.
해결은 늑대와 페릿 비유, 눈사람을 통해 해보려고 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
졸문이지만, 언제나 잘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며. 다음번엔 가까운 시일내에 뵙겠습니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스 리리컬 동맹단 가든지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