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관리국 무한서고.
과거 무한서고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을 무렵엔 기밀자료와 일반 열람 가능 자료가 같은 책장에 뒤죽박죽 섞여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허가된 사람만이 무한서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10년 전 현 무한서고 사서장 유노 스크라이어의 등장으로 무한서고의 정리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10년이 지난 오늘날은 대부분의 책들이 있어야할 곳을 되찾게 되었다. 그래서 요 몇 년 전부터 지정된 장소 몇몇을 일반인에게도 열람허가하고 있어 독서를 즐기는 이들에겐 좋은 쉼터가 되고 있다. 독서를 좋아하는 이라면 어른이든 어린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올 수 있는 곳이 된 무한서고. 그렇기 때문에 가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싫대도.”
디스플레이 너머 애원하는 페이트를 보며 거절의 말을 건넨다.
“유노, 그러지 말고 한번 가봐”
거절의 말을 들었지만 페이트는 포기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
“내일모레는 서고일로 바빠.”
“내일모레는 서고 정규 휴일이잖아.”
그걸 어떻게……, 너무 많이 써먹어서 미리 조사해놓은건가. 하지만 이럴 때를 위한 변명도 있다.
“아, 그 날은 학회 참가 준비해야되.”
이건 반박 못하겠지.
“유노군이 참가하는 학회는 저번 주에 끝났을 텐데?”
어떻게 안거야. 순간 서고 안을 종횡무진 누비는 늑대 한 마리가 떠오른다. 알프, 왜 이번 주 내 일정을 자세히 묻나했더니, 이거 때문이었냐. 주인과 그 사역마의 완벽한 콤비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페이트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러니까 유노. 내일모레는 나노하하고 같이 영화보고와.”
“나노하가 바쁠 수도 있잖아.”
내가 한가해도 나노하는 한가하지 않을 수 있다.
“유노가 나노하에게 데이트 신청하면, 나노하는 남는 휴가 아니 없는 휴가라도 만들어 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나노하한테 폐 끼치는 거잖아. 간뜩이나 교도관일로 바쁠 텐데. 천금 같은 휴가를 나랑 보내도 될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지만, 곤란한 듯 보였던 페이트의 얼굴은 이미 승리의 미소가 번져있다.
“하지만 페이트……”
“불평은 거기까지. 보내준 표는 나노하가 꼭 보고 싶어 하는 영화의 표니까. 유노가 말만 잘하면 될 거야.”
그 말 잘하는 게 문제란 말이야. 나노하 앞에선 일상생활 이야기는 잘할 수 있지만 이런 쪽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하면 입술이 만년빙에 갇힌 듯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다. 살짝 한숨이 나온다.
“실패하면 더 이상 도전 안 할 거야.”
“누구의 데이트 신청인데, 걱정하지 마 유노. 그럼 이만”
페이트는 만족한 얼굴로 통신을 종료했다.
“나 참”
오른쪽 뒷주머니에서 영화표 2장을 꺼낸다. 어제 페이트가 나노하하고 보러가라고 선물해준 표이다. 받기를 거절했었지만 페이트는 내 주머니에 표를 억지로 집어넣고는 그래도 달려가 버렸다. 아무리 도망치는 거라지만 소닉무브는 반칙이야 페이트. 페이트의 성의는 고맙지만 나노하에게 데이트신청하기엔 너무 갑작스러워서 오늘 연락하여 표를 돌려주려고 했었다. 뭐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나노하. 데이트 신청 받아줄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말한다면 받아줄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사서로서의 생활은 아무래도 타인과의 교류보다 책하고의 교류가 많은 편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최상의 직업이긴 하지만 타인과의 대화가 적다보니 가끔 타인과의 대화 특히 이성과의 대화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도 호감 가는 사람일수록 말이다.
잘할 수 있을까.
차라리 학회 중앙에 서서 수많은 교수와 학자들의 질타와 힐난을 맞받아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 그 경우에는 준비만 만전을 기하면 훌륭하게 반박할 수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하면 될 거야. 만전을 기해도 너무 신경을 써서 머리하고 입이 굳어버리면 끝이니. 나노하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자. 그러면 나노하도 쉽게 받아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데이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곤란한데. 불안한 예상이 스친다. 나노하라면 정말 데이트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나노하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재기불능이 될 것이다. 한번 불안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연속적으로 불안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아아!”
나뭇가지에 붙은 벌래들을 털어내듯 힘차게 소리 질러본다. 사서 몇 명이 무슨 일인가 쳐다보지만 그냥 무시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말자. 닥쳤을 때 실망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나노하에게 어떻게 데이트 신청할 건지만 생각하자. 그렇게 결심하는 순간 갑자기 통신회선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통신회선을 열자 안내를 맡고 있는 젊은 남자 사서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보인다. 무슨 일이지?
“손님 오셨습니다.”
“누구?”
설마 나노하가!
“공주님이요.”
아……, 하긴 이 시간에 나노하가 올 리 없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초침이 하루에 반이 이미 지나갔음을 묵묵히 알리고 있다. 정말 올 시간이네. 평소라면 만나러 갔겠지만 오늘은 만나러 가고 싶지 않다.
“3일 동안 철야 후에 빈사 상태에 빠져서 염라대왕에게 사건 경위서 쓰고 있는 중이라 못 만나겠다고 전해줘.”
“하지만……”
사서가 곤란한 듯 웃는다.
“그렇게 전해……”
“그런 것 치곤 팔팔해 보이는 데 유노군?”
방울이 울리는 것처럼 맑은 목소리와 함께 화면 한쪽 구석에서 금발의 아이가 얼굴을 비춘다.
“비비오. 듣고 있었냐.”
모니터에 비쳐진 아이는 비비오였다.
“응. 그러니까 빨리 와. 사서장실에서 기다릴게.”
통신 화면이 종료된다. 내 말 좀 더 듣고 끄란 말이다. 페이트나, 비비오나. 어쩔 수 없이 내 주위를 공전하고 있던 책들을 접어 제자리에 보내고 사서장실로 향했다.
내가 비비오를 만나게 된 건 JS사건이 끝나고 그 아이가 무한서고에 온 날이었다. 무한서고에는 일반 자료나 소설뿐만 아니라 전 차원에서 모인 재미있는 동화책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지 않지만 아이들도 부모를 따라 서고에 놀러오기도 한다. 비비오의 경우는 학교 친구들을 따라 무한서고에 놀러오게 되었다.
동화책이 왜 얇은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나이 또래 애들은 책을 좋아하긴 하되 오래 읽질 못한다. 거기다가 쉽게 질리기도 해서 한권의 책보다는 여러 권의 책을 번갈아가며 읽는 편을 좋아한다.
하지만 비비오의 경우는 달랐다.
책 속으로의 몰입. 책 한권을 잡으면 진득하게 앉아서 다 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동년배 아이 아니 어른도 쉽게 하지 못할 정도의 몰입. 2년 동안 계속 봐 온 거지만 아직도 신기하다.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무슨 소리야. 너도 그랬다고.”
어느 날 그 이야기를 알프에게 했더니 알프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정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생각됐으려나. 약간 쑥스러워졌다.
아무튼 비비오가 무한서고에 온 첫 날. 비비오는 집에 가자고 보채는 애들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책만 봤다. 열람 가능 시간이 끝나갈 무렵까지. 요즘에도 그렇지만 평소에는 나노하가 데리러 오는데. 그 날은 나노하가 늦게까지 일하느라 미처 비비오를 챙기지 못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약간 씁쓸한 일이지만 덕분에 그 곳을 지나가던 나와 비비오가 만났으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뭐 보고 있니?”
조그만 아이가 자기 어께보다 커다란 동화책을 펴놓고 보고 있는 모습은 정말 귀여운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비비오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당황하기도 하련만, 비비오는 눕혀놨던 동화책을 들어 제목을 보여주었다.
“재미있는 동화책을 보고 있구나.”
비비오가 보고 잇던 동화책은 소위 명작반열에 든다는 동화책이었다.
“네. 정말 재미있어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말한 비비오. 그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는 피곤에 지친 나까지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무슨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가지고 있던 음료수를 주었다.
“이거 마시고 보렴”
“고맙습니다.”
동화책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음료수를 받은 비비오는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었다. 정말 예의바른 아이였지.
옛날 일을 회상하면서 걸으니 어느새 사서장실에 도착했다.
사서장 실의 문을 열자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책장과 가운데 접대용으로 놓아둔 쇼파가 보인다. 사서장실로 한발자국 들어가자 마른 잉크 냄새와 질 좋은 종이 냄새가 나를 반긴다. 역시 좋은 냄새. 책의 향기를 잠시 즐기고 사서장실 안쪽을 바라봤다.
“아, 유노군 왔어?”
비비오는 자기가 사서장이라도 되는 냥 내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정말 그 예의바른 아이가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약한 세상한탄을 한 뒤에 비비오에게 다가간다. 비비오는 내가 가까이 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책을 보고 있다. 무슨 책이지? 비비오가 보는 책들은 날이 갈수록 수준이 높아지고 있어서 9살이 된 요즘엔 문학 소설도 보는 편이다. 그러고 보니 비비오가 보고 있는 책 어디서 많이 본 책인데? 비비오의 뒤 쪽으로 돌아 책을 바라본다.
‘마사키는 사에코의……’
“우아아아아앗!”
급히 책을 빼앗는다.
“쳇”
“뭐가 쳇이야!, 너 이게 뭔지 알아!”
“뭐긴, 유노군의 비밀 컬렉션이지.”
비비오는 무슨 당연할 걸 묻냐는 표정을 짓는다. 알면서도 본거냐.
“어린애가 이런 거 보면 못써!”
“그러면 유노군은 봐도 괜찮고?”
“…………”
윤리상 문제가 되진 않지만 그렇게 말하니 답할 수 없다.
“뭐, 유노군은 어른이니까. 비비오가 인정해줄게.”
네가 인정해서 뭘 어쩌자고.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찾아낸 거야.”
어제 저녁에 부하 녀석이 재미있다고 보라고 준거인데. 내용이 내용인지라 2번째 서랍에 제일 밑에 넣어놓고 다시 오면 주려고 했다. 정말로!
“유노군 특제 검색마법으로.”
비비오는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든다.
“난 이런 데 쓰라고 가르쳐준 게 아니야.”
“헤헤, 미안”
비비오는 작은 혀를 내밀고는 자신의 머리를 콩하고 친다.
“정말이지”
혼내려고 해도 저렇게 나오면 혼낼 수 없다. 뺏은 책을 원래 자리에 집어넣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비비오 근데 오늘은……”
“유노군”
비비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끊는다.
“응?”
“물어볼게 있는 데 물어봐도 돼?”
폭풍 한가운데 있는 집 안에 있는 아이처럼 불안한 표정을 짓는 비비오.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나.
“응, 뭐든 물어봐.”
“유노군, 혹시 연상취향?”
난 비비오의 머리를 한 대 때려줬다.
“아앗!”
“애가 그런 거 물어보면 못써.”
정말이지 2년 만에 애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지. 책은 정신적 성장을 돕는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나한텐 중요한 문제란 말이야.”
너한테 중요한 문제여봤자지. 비비오는 아파서인지 분해서인지 울먹거린다.
“그래봤자. 안 말해줘.”
“쳇, 안 속네.”
바로 표정 바꾸는 비비오. 어디 한두 번 속아야지.
“오늘은 무슨 일이야?”
옛날 같으면 책 찾아달라고 온 거겠지만, 요즘엔 검색마법도 배워서 그런 이유로 날 찾지는 않는다. 물론 비비오가 서고에 오는 날이면 매번 만나기는 하지만 오늘은 좀 이르다. 보아하니 책도 안 읽고 만나러 온 것 같다.
“유노군이 보고 싶어서”
볼에 홍조를 띄우고 얼굴을 살짝 숙이면서 한 말이라 임팩트 있지만 9살짜리한테 이런 말 들어봤자 하나도 안 기쁘다.
“그런 농담하러 온 거면 어서 돌아가.”
오늘은 나노하한테 어떻게 데이트 신청해야하나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피~ 농담 아닌데.”
비비오는 삐진 듯 볼을 부풀린다.
“나 보러 온 거면 지금 봤으니까 이제 돌아가.”
“흥~ 싫네요. 정말이지 유노군은 너무 앙탈이 심해.”
양손을 허리에 짚은 채 한숨을 쉬는 비비오. 한숨은 내가 더 나올 것 같은데 왜 네가 쉬는 거냐. 비비오는 나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슬쩍 보더니 바위에서 토끼가 뛰어 내리듯 내 의자에서 내려왔다.
“유노군.”
“응?”
“나 배고파.”
비비오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자기배가 불쌍한 것처럼 쓰다듬는다.
“학교에서 점신 안 먹었어?”
요즘엔 맞벌이 부부가 많다보니 오전 수업만하더라도 점심을 주는 학교가 많아졌다. 비비오가 다니는 학교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게……”
비비오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본다. 설마……
“또 책보느라 안 먹었지.”
“헤헤”
비비오는 쑥스럽게 웃었다.
“헤헤가 아니지!, 아무리 책이 재미있어도 네 할 일은 다 끝나고 보라고 저번에 말했었잖아.”
“미안해 유노군”
“정말……”
책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점심을 빼먹다니.
“유노군 설마 나 걱정해주는거야?”
비비오는 내 허리를 안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당연하지.”
비비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헤헤”
비비오는 뭐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 옷에 자기 이마를 비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먹고 다녀야된다.”
“응!”
“그래야 나노하가 걱정하지 않지.”
독서는 아이의 정신적 성장과 지식을 쌓는데 좋은 역할을 하지만 비비오는 한창 성장기이다. 제 때 먹고 자지 않으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나노하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 그러면 그렇지.”
비비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나에게 떨어진다. 걱정해줬는데 한숨이라니. 한마디 하려고 했더니 이미 비비오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문 앞에 서있다.
“유노군 뭐해!, 빨리 가자”
비비오는 자기가 언제 한숨을 쉬었냐는 듯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든다.
“알았어.”
가볍게 책상정리를 하고 비비오와 식당으로 향했다.
앞서서 기운차게 걷고 있는 비비오를 보고 있으니 다시 비비오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비비오에게 음료수를 건네고 나서, 비비오와 막 대화하고 있는데 나노하가 헐레벌떡 서고로 찾아왔다.
나노하는 가정부로부터 집에 비비오가 없다는 말을 듣자 상당히 놀랐던 모양이다. 다행히 비비오의 친구로부터 연락이 되 비비오가 무한서고에 있다는 걸 알아냈지만 늦은 시간이라 상당히 불안해했었다.
“나노하?”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고 나노하로부터 연락도 없었기에, 난 갑작스러운 나노하의 방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유노군. 비비오 못 봤어?”
“비비오?”
“마마!”
그 때까지만 해도 책에 몰입하고 있던 비비오가 나노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책을 덮고 나노하에게 달려왔다.
“비비오!”
비비오를 발견한 나노하는 불안한 표정을 한 번에 날려버리고 달려오는 비비오를 안으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어딜 간다면 어디를 간다고 연락해야지. 마마가 걱정했잖아.”
“죄송해요”
코알라 모녀처럼 소중히 서로를 껴안는 나노하와 비비오. 누가 봐도 흐뭇한 광경이었지만 난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 비비오였구나.”
부끄럽게도 그 때 난 비로서 그 아이가 비비오였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와서 변명하자면 비비오의 인적사항을 조사하기위해 그 아이 사진을 본 적 있었지만 사진에서 본 무뚝뚝한 표정과 그 생기발랄한 표정의 괴리감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한 거다. 정말로.
짧지도 길지도 않은 포옹의 시간이 끝나고 나노하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유노군이 비비오를 돌봐주고 있었던 거야?”
정말로 고맙다는 생각이 드러나는 나노하의 얼굴. 그런 부모다운 얼굴에 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으응”
“고마워 유노군.”
“마마, 이 오빠하고 아는 사이야?”
비비오는 자신의 마마와 내가 아는 사이인 게 신기했는지 궁금한 눈초리로 우리 둘을 바라봤다.
“응. 유노군은 마마의 소꿉친구란다.”
소꿉친구. 가까우면서도 거리 있는 그 단어가 내 가슴을 살며시 짓눌렀다.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타카마치 비비오라고 합니다.”
음료수를 건네면서 대화는 했지만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 상황. 비비오는 예의바르게도 손을 앞으로 모으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난 유노 스크라이어라고 해.”
인사에는 인사. 가볍게 목례를 하며 비비오에게 인사했다.
“유노 오빠네요.”
비비오는 오빠라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그 때는 날 오빠라고 불렀는데. 식당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고 앞서 걸어가고 있는 작은 여우를 바라본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비비오는 무슨 일인가 뒤를 돌아보았다.
“유노군, 빨리 와!”
활기찬 얼굴로 손짓하는 비비오. 도대체 언제부터 유노군으로 불리게 된 거지. 살짝 체념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언제부터 비비오가 날 유노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알고 있다.
비비오는 처음 만난 날 이후로 정말 문턱이 닳도록 무한서고로 놀러왔다. 맨 처음 일주일동안엔 애들과 같이 서고에 와서 책을 보다가갔지만, 그 이후엔 혼자 오는 날이 많아졌다. 왜 혼자 오냐고 물어봤더니 애들이 비비오는 책만 보고 같이 안 논다고 안간 댄다. 그래서 자기도 그냥 안갈까 생각했지만 책 읽는 게 너무 좋아서 혼자 서고에 온 거라고 말했다. 같이 웃어 줄 수도 울어줄 수도 없는 이야기. 그래도 너무 기특하기에 책을 좋아하는 그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게 계기였을까?
비비오는 혼자 서고에 오는 날이면 날 찾았고, 같이 책도 보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또 무슨 책이 재미있었는지 같은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이 나이 또래 애들은 어른이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같은 책을 읽거나 비슷한 경험을 해도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그렇기에 비비오와의 대화는 상당히 즐거웠다. 거기다가 비비오를 데리러 오는 나노하랑 대화할 시간이 많아져서 기쁘기도 했고.
그렇게 두 달이 지나니, 비비오와도 상당히 친해지게 되었다. 물론 그 때까지 비비오가 날 부르는 호칭은 ‘유노 오빠’. 유노군이 아니었다. 유노군이라고 불리게 된 건 두 달하고 며칠 후에 있었던 한 사건, 아니 사건이라고 하기도 뭐한 대화 때문이었다.
그 날은 나도 나노하도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어서 비비오와 같이 크라나간 시에 있는 오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물론 비비오는 코코아. 맨 처음 이야기의 화두는 단연 비비오였다. 그 밖에 다른 공통화제도 몇몇 있지만 비비오만큼 흥미를 주거나 유쾌한 화제는 아니었다.
“정말이지 유노군도 참~”
계속되는 비비오에 대한 칭찬에 나노하는 부끄러운 듯 손사래를 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식 칭찬하는 데 싫어하는 부모 어디 있겠는가? 나노하는 내 말을 즐겁게 들었고 나노하도 질세라 비비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내 말에 과장이 조금 섞이긴 했지만 비비오에 대한 내 생각은 솔직한 것이어서 말하는 나도 상당히 즐거웠다.
“제 애긴 그만하세요~”
본인의 이야기를 계속 말하니 비비오는 약간 심통이 난 듯 보였다. 하지만 칭찬을 듣는 것은 그 무엇이 됐던 기쁜 것이기에 비비오도 그 말 한마디만 하고는 나와 나노하가 무슨 이야기를 할이지 계속 귀담아 들었다.
정말로 유쾌한 시간.
소녀라기 보단 아줌……, 아니 어머니같은 나노하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씁쓸해지긴 했지만. 정말로 유쾌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유쾌한 화두도 점점 소재거리가 떨어져가자 금세 다른 화두로 전환했다. 10년 전 나노하가 처음 마법을 배웠던 때의 이야기로.
“그 때 정말 나노하 대단했어. 가르쳐주면 바로 소화하고 가르쳐주면 또 소화하고. ‘천재란 게 이런 거구나’하고 생각했었다니까.”
“유노군~, 치켜세우지 마.”
“정말이야.”
1%의 과장도 없는 말. 정말 그때의 나노하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게다 유노군이 잘 가르쳐준 덕분이지.”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나노하. 그런 나노하를 보고 있던 비비오가 입을 열었다.
“마마. 유노 오빠한테 마법 배웠어?”
“응. 유노군은 내 마법 스승이야.”
그 말에 비비오는 추리 소설에서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졌을 때 놀란 독자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비비오는 날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벌써 그게 10년 전 일이네.”
나노하의 목소리에서 그리움이 푹푹 묻어난다.
“그러네.”
어느새 10년 전을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든 걸 알아가려고 노력했다. 세상도. 마법도. 고고학도. 그리고 나노하도……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나노하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 황급히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노하도 비슷한 걸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서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안하는 상태. 방금까지 그렇게 유쾌하게 대화하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고 나서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기분 나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공기가 부끄러우면서도 달콤했으니까. 그래서 그 공기에 너무 심취해 비비오의 표정이 바뀌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이 기회에 나노하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나노……”
“마마, 가요.”
내가 용기를 쥐어짜 나노하에게 말을 걸려하자 비비오가 나노하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을 가로챘다.
“응?”
“집에 가요.”
냉랭한 비비오의 목소리. 그 때까지 그런 비비오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가 상당히 화도 난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비비오의 태도 변화에 둘 다 당황했지만 비비오는 그런 건 내 알바 아니라는 식으로 나노하의 소매를 붙잡아 당겼다.
“알았어. 비비오. 유노군 그럼 다음에 봐”
나노하는 앞만 보고 걸어가는 비비오에게 반강제로 끌려가면서 나에게 인사했다.
왜 그런 거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기분 좋은 상태였는데. 물론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비비오를 신경 쓰지 못했지만.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거라기엔 무언가 이상했다. 어디에서 화가 난 걸까. 그런 의문을 품은 채 다음날 비비오를 만나게 되었다.
“유노군!”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비비오.
“뭐?”
순간 내 뒤를 의심했다.
“유노군!”
역시 잘 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저기 비비오, 유노군이라는 호칭은……”
“유노군은 유노군이니까. 유노군이야 알았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비비오. 도대체 어제 그 일이 무슨 심경변화를 일으킨 걸까. 유노 오빠에서 유노군이라는 호칭으로 바뀐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무언가 결심한 듯 밀어붙이는 비비오를 보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비비오의 이상행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노군 나 마법 가르쳐줘.”
비비오의 부탁은 유노군이라는 호칭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마법은 학교나 나노하가 가르쳐 줄 거아냐.”
“…………까”
들리지 않는 말.
“응?”
“마마가 유노군에게 배웠으니까!”
그런 거였나. 요컨대 비비오는 나노하처럼 되고 싶어서 나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거였다. 여자아이가 엄마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유노군이라는 호칭도 납득이 되었다. 또 그런 거라면 약간 도와줄 수 있다.
“그럼 가르쳐줄게”
“정말?”
비비오의 눈이 순간 반짝거렸다.
“단 검색마법만이야. 다른 마법은 나노하나 학교에서 배워야 된다.”
“응!”
비비오는 기운차게 만세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비비오”
“응?”
“다음부터는 마마처럼 되고 싶다고 아무거나 마마 따라 해서는 안돼. 알았지?”
“…………, 바보.”
그 때 왜 비비오는 실망한 얼굴로 바보라고 말했을까.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다.
옛날 일을 생각하면서 걸으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그런지 식당은 한산한 편이다. 이때를 노리고 온 사서들 얼굴이 몇몇 보인다. 사서들과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로 인사한다.
“유노군 뭐 먹을래?”
비비오는 마치 자기가 살 것처럼 당당하게 주문대로 다가간다.
"나는 그냥 아이스커피."
고민이 많다보니 식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안 돼 유노군. 밥은 제 때 제 때 먹어야지.”
비비오가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나에게 설교하듯이 말하자 무슨 대화를 할까 귀 기울이던 사서들이 숨죽여 웃는다.
“그럼 아이스커피하고 네가 원하는 거 2개 시켜.”
식욕이 없어서 먹고 싶지는 않지만 더 이상 시선을 끌고 싶지 않기에 그냥 비비오 뜻에 따라야겠다.
“응 그렇게 나와야지. 아줌마 돈까스 2개 주세요.”
비비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당히 음식을 주문한다. 사는 건 내가 사는 건데 왜 저렇게 당당한 건지.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건 역시 아이의 특권인 것 같다. 돈을 내고 음식을 받아 테이블에 앉았다.
“에헤~, 맛있겠다.”
비비오가 음식을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직장 식당은 다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돈까스나 제육덮밥같은 길거리에 나가면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에 경우일수록 더더욱. 틀린 말은 아니지만 관리국 측에서 국원들의 식사엔 꽤나 예산을 들이고 있어서 관리국 식당은 꽤 평이 좋은 편이다. 특히 나같이 나가서 먹을 시간이 부족한 사람에겐 말이다.
“유노군”
“왜?”
“썰어줘.”
비비오가 돈까스를 내게 내민다. 자세히 보니 내 것이나 비비오 것이나 돈까스가 잘려져있지 않다. 이 식당은 주로 사서들이 이용하는 곳이라 애들 먹기 좋게 썰어놓지 않았나보다.
“알았어.”
포크와 나이프를 잡고 돈까스를 비비오가 먹기 좋게 썰어서 비비오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비비오는 돈까스를 바라볼 뿐 먹지 않는다. 왜 그러지. 썰어놓은 게 너무 큰가?
“먹여줘 유노군”
그거였냐! 비비오는 마치 애인과 첫 키스할 때 여자처럼 기대하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입을 살짝 열었다. 주변을 슬쩍 쳐다보니 사서들. 특히 여사서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이 녀석은 지금 자기가 얼마나 주목받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빨리 안 먹으면 다 먹고 먼저 간다.”
“피~”
비비오는 김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눈을 뜨고는 포크를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못 말려.
비비오는 역시 배가 고프긴 고팠나본지 돈까스 한 조각을 입에 넣자 입을 잔뜩 오므리고는 부들부들 떤다. 어지간히 맛있었나보다. 감탄할 맛까지는 아닌데 역시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는 건가. 마치 토끼가 당근을 먹듯 계속 입에 들어가는 돈까스. 일인분 가지고는 모자랄 것 같아서 내 것도 절반정도 덜어줬다. 정말 맛있게도 먹네.
“유노군 내가 먹는 모습에 반했어?”
이런 말만 안하면 정말 귀여울 텐데.
결국 남는 돈까스를 다 먹은 비비오는 우유를 배불리 먹은 아기고양이처럼 몸을 한껏 늘여 트려 턱을 식탁에 갖다 댄다. 나도 다 먹고 얼음이 반쯤 녹아 맛없어진 아이스커피의 빨대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유노군 그런데 말이야.”
식탁에 턱을 댄 채로 비비오는 입을 열었다.
“응?”
“마마한테 데이트 신청할거야?”
“그걸 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놀라서 입 밖으로 나오려는 커피를 간신히 참고 물었다.
“무한서고 사서들은 다 내편이라고.”
비비오는 자랑스러운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도대체 누가 알려 준거냐. 주위를 돌아보자 이쪽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사서들이 모두 어께를 움츠리고 도망간다. 한, 한 사람이 아닌 거냐.
“유노군 대답해봐~”
리더와 부하관계의 신뢰관계 재고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날 아랑곳하지 않고 비비오는 계속 보챈다.
“글쎄……”
데이트 신청을 할 거다. 하지만 ‘어떻게’에 대해선 계속 고민된다. 직접 만나서 말할까. 명색이 데이트 신청이니까 역시 직접 만나서 말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굳어서 말 못할 것 같다. 그냥 전화로 할까. 굳어서 말 못하는 염려는 덜겠지만 직접 만나지 않고 말하는 건 역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겠지.
계속 고민하고 있자, 비비오는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아!, 비비오를 통해서 전해볼까.
“난 절대 안 도와줄 거야.”
“난 아무 말도 안했어.”
어떻게 눈치 챈 거지.
“유노군 속마음이야 뻔 하다고.”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비비오. 애, 애한테 한심하게 생각된다니. 조금 충격이긴 하지만 애한테 데이트 신청을 대신 해주도록 부탁하는 건 확실히 한심한 일이겠지. 역시 직접 만나서 말하자.
“저기 비비오. 내일모레 나노하 무슨 일 있어?”
“내일모레는 마마 바쁜 걸로 아는데. 신입 국원들과 훈련이 있다고 했어.”
“그래……”
바쁘다면 그냥 포기할까. 급격하게 기분이 다운된다.
“유노군 그렇게 시무룩해 있지 말고. 마마랑 데이트 안 할 거면 나랑 하자!”
“됐네요.”
“아앙~, 그러지 말고. 페이트 마마가 준 표 안가면 아깝잖아. 거기다가 유노군, 같이 갈 애인도 없잖아~”
“난 일이 애인이야.”
“그거 마마랑 잘 안될 때 쓰는 말인거 알고 있어.”
윽.
“저, 정말이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린다.
“흐응~”
비비오는 탐정이 범인을 추궁하듯 의심쩍은 얼굴로 날 쳐다본다.
“정말이라니까.”
“흐응~,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갑자기 비비오의 얼굴이 밝아진다. 급격한 비비오의 표정변화가 조금 불안하다.
“유노군.”
“응?”
“앞으로 딱 10년만 일하고 애인하고 있어. 그러면 10년 후에 내가 데리러 갈게.”
“…………”
비비오의 기습 발언에 어인이 벙벙해진다. 비비오는 자기가 말했어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힌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하는 눈치다. 어떻게 대답해줘야하나.
“어린애는 취향이 아니네요”
비비오도 반 장난 식으로 말했으니 이렇게 말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그러니까~, 10년 후에 데리러 간대도.”
“그래도 비비오는 비비오니까.”
“10년 후면 나도 매력적인 어른이 될 거라고.”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비비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대화하는 것은 더더욱 즐겁다.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존재란 게 이런 거겠지. 10년 후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그 때도 계속 빛나고 있을 것 같다.
“왜 웃어~”
나도 모르게 웃었다보다.
“비비오가 너~무 귀여워서.”
“…………”
목 언저리부터 이마까지 저녁노을처럼 새빨개지는 비비오. 본인은 장난으로 좋아한다 좋아한다 자주 말하지만 나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별로 없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앞으로 놀릴 때 비장의 무기로 써먹어야겠는걸. 비비오의 새빨개진 볼을 한 손을 잡았다.
“아으파아”
아프다고 말해도 자기 손으로 떨어트리려하지 않는 거 봐서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으이구, 이 귀여운 것”
“피이~”
인상을 찌푸리는 비비오. 장난으로 귀엽다고 말한 걸 눈치챘나보다.
“유노군~!. 비비오”
뒤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설, 설마.
“나나나나나나, 나노하!”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나노하가 있었다. 제복차림인 것 봐서는 아직 근무 중인 것 같다.
“뭘 그리 놀래”
나노하는 날 보며 눈웃음을 짓는다.
“유우노우구우운”
이런. 급히 비비오의 볼에서 손을 놓았다.
“여전히 사이좋네. 매번 비비오를 돌봐줘서 고마워. 유노군.”
“뭘 그런 것 가지고.”
자연스럽게 맞은 편 의자를 권하자 나노하는 치마를 앞으로 당기며 앉는다.
“유노군이 절 돌봐주는 게 아니라 제가 유노군을 돌봐주는거에요~”
“그러니?”
나노하는 비비오가 기특한 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떻게 할까.
데이트 신청할 절호의 기회다. 갑작스럽지만 자연스러운 분위기니 이런 분위기를 이어서 말한다면 나노하가 받아줄지 모른다. 살짝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나노하.”
“응?”
비비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나노하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굳지 마 유노 스크라이어.
“내일 모레 시간 있어?”
“내일 모래?”
비비오로부터 이미 들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확인차 물어본다. 오른손 검지로 아랫입술을 살짝 밀쳐 올리며 생각하는 나노하. 긴장이 돼서 숨이 다 멎어버릴 지경이다.
“내일 모레는 휴일이긴 한데 무슨 일 있어?”
뭐? 순간 비비오를 바라본다. 시선을 피하는 비비오. 거짓말이었나. 비비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일단 데이트 신청이 먼저다.
“내가 이번에……”
“마마!”
갑자기 비비오가 나노하를 부른다.
“응?”
“나 급히 마마에게 말할 게 있어요.”
“그래?. 그럼 유노군이랑 이야기하고 나서.”
“급하단 말이에요.”
비비오는 의자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나노하의 팔을 잡아당긴다. 이 모습 어디선가 본 적있는 것 같은데. 나노하는 의자에서 강제로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유노군 미안한데……”
“오늘 저녁에 전화할게”
“고마워.”
“빨리 가요~”
줄다리기를 하듯 나노하의 팔을 안간힘을 다해 당기는 비비오. 저거 분명히 일부러겠지? 비비오를 쳐다보니 역시나.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비비오는 혀를 삐죽 내민다.
“그럼 유노군. 일 열심히 해”
“응. 나노하도. 비비오도 잘 가”
비비오는 내 말을 무시하고는 나노하만 계속 잡아당긴다. 그러나 역시 에이스 오브 에이스. 요지부동이다.
“비비오. 유노군에게 인사해야지”
“흥이다~, 뭐.”
고개를 획돌리는 비비오.
“애가……, 미안해 유노군.”
“아니야. 이따가 저녁에 연락할게”
“응. 그럼 잘있어~”
나노하와 비비오는 식당 출구로 사라졌다.
“휴우~”
나노하와 비비오가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비비오와 대화하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지만 고민이 있는 가운데 비비오와 대화했더니 많은 정신력이 소모된 느낌이다. 거기다가 나노하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정말 머리에 작은 태풍이 지나간 것 같다. 이제 얼음이 다 녹아 물인지 커피인지 모를 음료를 입에 가져다댔다.
비비오 녀석.
거짓말에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노하를 데려가다니. 혀를 삐죽 내민 비비오의 모습이 떠오른다. 볼을 꼬집어서 그런가? 아니면 놀려서?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않았고 그전에 이미 거짓말을 했으니까.
마마를 지키기 위해서인가.
그런 거라면 납득이 간다. 양모녀사이라고 해도 나노하하고 비비오 사이는 친모녀 사이의 그것보다 더 끈끈한 것이 느껴지니까. 마마를 빼앗기고 싶지않다는 그런 위기감이 거짓말을 하게 한 거겠지.
“앞으로 딱 10년만 일하고 애인하고 있어. 그러면 10년 후에 내가 데리러 갈게.”
에이~, 설마.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든다. 엄마를 빼앗기고 싶지 않는 딸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이게 제일 설득력 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다음날
어젯밤 나노하에게 전화해서 결국 데이트 신청에 성공했다. 전화기 너머로 비비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건 무시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고 너무 기뻐서 어젯밤 내내 잠을 설쳤다. ‘애도 아니고……’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기쁜 걸 어쩌겠는가. 기쁜 마음에 가벼운 걸음으로 서고문을 열었는데 사서들이 몰려있다. 무슨 일이지? 가까이 다가가 사서 한명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가?”
“아, 사서장님.”
어제 비비오를 공주님이라고 부른 남자 사서다. 묘하게 기쁜 얼굴이네.
“오늘 신입 사서들이 오는 날이잖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신입들이 첫 출근을 하는 날이다. 데이트 신청 때문에 이런 중요한 이벤트를 까먹고 있었다니. 신입들에게 미안해진다.
“유노오구우우우운~”
사서들이 둘러싼 정중앙. 익숙한 목소리가 날 부르고 있다. 서, 설마. 빙둘러 싸고 있는 사서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유노군~”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비비오가 있었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당연히 무한서고 사서로 있는 거지.”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라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말하듯 당당하게 말하는 비비오. 설마 내가 아직 꿈꾸고 있는 건가.
“시험은?”
무한서고 사서가 되려면 기본적인 학문지식과 사서로서의 자질을 테스트하는 시험을 치러야한다.
“당연히 패스. 누구 제자인데 떨어지겠어. 아 그리고 무한서고 사서는 나이제한 없는 거 알지?”
알다마다. 어린 나이에 내가 사서가 되면서 없어진 조항이니까. 하지만 진짜 9살짜리가 들어올 줄이야.
“너 학교는 어떡하고.”
“요즘은 투잡시대라잖아. 당연히 학교 다니면서 무한서고 사서할 거야.”
“나, 나노하한테는 허락받은 거야?”
“응 어제. 시험 보기 전에 말하면 반대하실 것 같아서 합격하고 말했지.”
어제 급히 말할게 그거였구나. 비비오는 잘했지라고 말하며 웃는다.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 달라는 눈치다.
“오늘부터 무한서고 사서가 된 타카마치 비비오예요. 사서 오빠, 언니들 잘 부탁드려요!”
내가 어이없어하며 가만히 있자 비비오는 뒤를 돌아 사서들을 향해 기운차게 인사한다
“기운차다!”
“오~ 말하는게 귀여운데.”
“알프씨에 이은 무한서고 마스코트네.”
“잘 부탁해 타카마치양.”
곳곳에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와 웃음소리. 부하들은 비비오가 사서가 된 게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하긴 이미 내 편 운운할 정도로 비비오는 사서들과 친하니까. 으이구, 머리야. 그래도 한사람정도는 반박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갑자기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다. 비비오는 사서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다시 내게 다가왔다.
“유노군. 앞으로 10년 동안 곁에서 내 매력을 확실히 깨닫게 해 줄 테니까 기대해!”
이거, 앞으로 조금 곤란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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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달에 한번 일창게 문을 두드리는 풍월객입니다.
일창게 두 번째 비비오x유노물이군요. ( 첫 번째는 찬물녹차님이 쓰셨죠. )
블로그에도 밝혔지만 STS가 끝난 후에 제 비비오에 대한 호감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STS 이후에 나온 사운드스테이지 2개로 호감도가 급변했습니다.
7세의 비비오가 나오는 M3에서 비비오는 재미있는 책도 있고 유노군도 있는 무한서고에 놀러가는 게 취미라고 밝혔고. 꿈 중의 하나가 무한서고 사서라고 밝혔죠. 거기다가 이번에 나온 익스의 9세 비비오는 무한서고 사서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bravo!
두 사운드 스테이지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유노를 유노군이라고 부르면서 데레데레하고 있을 비비오가 상상이 되더군요. *-_-* 그래서 결국 써버렸습니다.
이 팬픽을 쓰면서 생각한게 이 팬픽은 비비오x유노이되 유노x비비오는 아니어야한다.라는 거였습니다. 13살 차이인데 유노x비비오면 되겠습니까(버럭!)
그래서 설정한 커플링은 유노->나노하 비비오->유노입니다. 비비오가 유노군이라고 불러도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해도 좋아한다고 말해도 유노는 나노하라는 필터로 비비오를 보기 때문에 이상무!
유노가 생각하는 비비오는 좋아하는 여자의 딸. 같이있고 대화하면 즐겁지만 조금 막무가내라 한숨 쉴 일이 생기기도 한다.
비비오가 생각하는 유노는 한심한 오빠. 그래도 좋아할 수 밖에 없음.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엄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걱정.
이라고 설정 잡았는데 잘 전달되었는지요 ~_~//
언제나 그렇듯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자 그럼, 또 4주 뒤에 뵙겠습니다. (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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