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칠더의 수도. 크라나간.
한 고층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거뜬히 200평은 넘어버릴 것 같은 공간에 불은 전부다 꺼져있고 테이블마다 고급스러운 촛대들이 놓여있다. 그 위에 초가 3개씩 놓여져있다. 약간은 어둡지만 그 것이 그렇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드가 있을 뿐이다. 코끝엔 초에 함유된 있던 것인지 모를 아로마 향이 느껴진다. 그리그 이 레스토랑에 있는 건 오직 나와 그. 그는 자리에 앉아 밖에 보이는 야경을 감상하고 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던 나를 바라본다.
“사랑해 긴가”
어디선가 분 바람에 촛불이 일렁인다. 불꽃의 방향이 바뀌면서 그의 얼굴을 시시각각 다른 방향으로 비춘다. 어딘가 여성스러운 얼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은 어떤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촛불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 얼굴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볼은 상기되어 있다.
“저도요”
나는 그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 것을 멈추고 그에게 대답한다.
“긴가”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목소리로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내가 살며시 눈을 감자 그의 오른손이 내 얼굴을 살며시 끌어당긴다.
“으음…”
그리고 이어지는 키스. 그가 살짝 윗입술을 들자 내 윗입술도 따라 올려진다. 그리그 그의 혀가 내 입 으로 조심스럽게…
어?
이상하다?
감촉이 안 느껴져?
“아!”
순간 눈이 떠졌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익숙한 천장. 나카지마가의 천장이다.
“또 그 꿈인가.”
요즘에 아침이면 우울한 이유 중 하나. 이번 달만 벌써 3번째. 레파토리가 조금씩 변하기는 하지만 같은 내용의 꿈이다. 그와 같이. 그와 대화하며 사랑을 속삭이고 이윽고…
“아, 정말!”
생각하자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진다.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도 안 개고 세면대로 달려간다. 그리고 세차게 수도를 틀고 물로 얼굴을 때리듯이 세수를 한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그 남자. 방금 꾼 꿈의 주인공. 요즘 우울한 기분의 근본 원인. 아직 한 번도 못 해본 첫 키스를 꿈속에서라지만 이번 달만 해도 3번이나 뺏어간 남자.
유노 스크라이어.
시공 관리국 무한 서고 사서장. 전도유망한 고고학자로 관리국내외 모두에서 유명한 남자다. 보통 능력이 좋으면 외모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 데 이 남자는 그것도 아니다. 또 그렇다고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싹싹한 성격은 직장 동료나 발굴단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소위 엄친아. 나도 예전에 몇 번 신문기사나 tv에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지만 나하고는 여러 의미에서 인연이 먼 남자였다. 그런 일만 안 생겼다면 말이다.
“긴가야, 이거 받아라.”
술 한 잔하고 오셨는지 약간은 취한 목소리로 아버지는 나에게 검은 파일은 건네셨다.
“이건?”
흡사 비밀장부라도 되는 모양이었지만 비밀장부라기엔 너무 새 것이었고, 아무리 술 취한 아버지라도 그런 것을 함부로 넘겨주실 분이 아니다.
“펼쳐봐라~”
약간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시면서 아버지는 재촉하셨다.
“어?”
순수하게 터져 나오는 당혹감. 의문. 왜 이 남자가 사진이 이 파일에 있는 것일까. 사진 속의 남자는 유노 스크라이어였다. 사진을 향해 부끄러운 듯이 보고 있는 모습은 전문기자가 아니라 지인이 찍은 모습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게 뭐예요?”
“뭐긴!, 아빠가 딸을 위해 남자를 공수해왔지!”
양손을 허리에 대고 등을 쫙 핀 아버지의 모습은 ‘딸아 칭찬해다오.’라는 모습이었으나 그 상황에 그런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딸보고 맞선보라는 거예요?”
“맞선이라니! 단지 이 아빠는 남자친구는커녕 남자랑 손도 못 잡아 본 딸을 위해 소개팅 자리를 주는 거란다!”
“하아?”
소개팅이라니. 아버지란 사람이 딸한테 소개팅을 시켜줘? 딸의 약점을 찔러 화내는 건 둘째치고 너무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하는 소리예요?”
“이 아빠가 말이 된다고 그러면 어딘가의 하얀마왕이 포격없이 대화만으로 적과 친구가 된다고 해도 딸은 믿어주는 거다!”
“……”
“그리고 설마 아빠가 딸아이 소개팅 상대를 모를까봐!, 무한서고 사서장. 유노 스크라이어 아니냐!”
취기가 더 돌아 약간 흥분하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한 손을 이마에 짚었다.
“혹시 아는 사이세요?”
약간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아버지께 물어보았다.
“당연하지. 직장 동료인데, 원하는 자료 말해주면 척척 가져다주는 대견한 청년아니냐!”
“전 잘 모르겠으니까. 지금은 주무시고 내일 이야기해요,”
술 취한 아버지 말을 계속 들을 수 없어 아버지를 부축해 침대에 눕혀 주무시게 했다. 그 다음날 아버지는 다시금 파일을 보여주시며 이야기했다. 어제 모습과 달리 침착하고 조리 있게 그리도 다소 황당하게.
내용인 즉슨 평소 업무 차 스크라이어 사서장과 교류가 있었던 아버지는 얼마 전 스크라이어 사서장과 술자리를 했고 술이 들어가자 아버지는 주책 맞게 나하고 스바루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스크라이어 사서장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추임새도 넣어주고 ‘정말로 좋으신 따님들이네요.’라고 부러운 듯 말하자. 순간 아버지는 딸과 소개시켜 준다고 약속하셔버린 것이다. 그러나 술이 깨시고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았으나 ‘사나이 한 입으로 두말 안 한다’가 신조이신 아버지는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셨고 나에게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술기운으로 나에게 이야기 하신 것이다.
“그러니… 긴가야, 이 아빠를 위해서라도.”
“싫어요.”
“그렇게 단박에 거절 할 필요는 없잖니 긴가야.”
“애초에 아버지 잘못이잖아요!”
“아니, 그래도 이렇게 좋은 남자 만날 기회는 드물잖니.”
“그래도 싫어요.”
“그럼 아빠는 누굴 소개 시키라고”
“스바루 있잖아요. 딸 소개 시켜준댔지 저 소개 시켜준 단 말 안했으니 스바루한테 말해보세요”
“긴가야, 정말 스바루를 소개시켜도 괜찮을까?”
순간 스크라이어 사서장과 바보 동생의 소개팅을 상상해버렸다.
“안…안돼요!”
아버지 망신, 내 망신, 여자 망신이다.
“그럼 네가 가는거다?”
“아…알았어요.”
기쁜 듯이 웃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난 못마땅한 목소리로 아버지께 대답했다.
거의 강제로 가게 된 소개팅. 솔직히 상대가 유노 스크라이어정도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를 무리시켜서라도 약속 취소하라고 할 거였다. 상대가 무한 서고 사서장이라 후에 아버지께 불이익이 돌아갈까 봐 걱정 되서라도 나가야했다. 상대가 미남에 기본 스펙, 내장 스펙까지 좋아서 간 건 아니었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그랬을 지도 모르겠지만.
짤랑짤랑
만나기로 한 케이크 가게 문을 열자 문에 달린 풍경이 소리를 냈다. 카페 내부는 엔티크 풍의 가구들이 놓여져 있고 창은 서향으로 놓여져 있는 가게. 케이크와 계란요리가 맛있는 곳으로 유명했고 노래를 잘하는 여점원이 있는 걸로도 유명했다. 반대쪽에도 카페 하나가 있는 데 케이크는 맛있지만 점원들이 ‘주인님, 주인님’을 외쳐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 남자를 찾기 위해 가게를 둘러보자 저 멀리 창가에 그 남자가 앉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주문한 지 얼마 안 된 커피는 김이 나고 있었고 마침 해가 지고 있어 그 남자의 얼굴에 노을이 비춰졌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모습.
멋있다.
순간 심장이 정지하고 숨이 막혔다. 순간 얼어서 멀리서 계속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그 남자에게 갔다. 아버지에 대한 불평도 잠시 접어놓은 채. 순수하게 기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유노 스크라이어씨인가요?”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소개팅 자리라고 해서 왔으나 누군가 봤다면 맞선 보러 왔냐고 물어볼 정도의 태도. 이제 그가 날 보기만 하면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앉으면 된다. 그런데 반응이 없었다.
“스크라이어씨?”
무반응
“저기요! 스크라이어씨?”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바라볼 정도로 언성을 높여도 무반응. 설마 이 남자.
자고 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났다. 순간 아버지도 모고 다 모른 채하고 집으로 가버릴까 생각했다. 이런 남자를 한순간이라도 멋있다고 생각한 내가 우스웠다. 결국 갈려고 하는 데.
“아? 나카지마 긴가양인가요?”
또렷하지만 약간 당황한 목소리. 마치 자고 있던 게 아니라 딴 생각하느라 못 들은 것처럼 나를 불렀다.
“네.”
그가 일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반대편 좌석에 앉아야 했다. 기분이 안 좋았기 때문에 교양 없이 앉는 부위가 충격에 순간 푹 가라앉을 정도로 털썩 앉았다. 그가 기분 나빠하더라도 오래 만날 것도 아니고 이번 한번만 만나고 다시는 안 만날 작정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교양 없이 앉았다.
“일이 정~말 많으신가봐요?”
“네. 요즘 같은 때엔 눈곱 뗄 새도 없이 바쁘죠.”
여기에서 자고 있던 걸 비꼬아 말한 건데 이 남자는 순진하게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리고 정적. 딱히 할 말도 없었고 이런 남자와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되는 정적.
“긴가양 혹시 이자리가 불편하신가요?”
“아뇨. 전혀요.”
침묵. 또 침묵. 이제는 분위기마저 싸해진다.
“죄송합니다.”
정적이 계속 되자 그는 갑자기 앉은 채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네?”
“제가 억지로라도 겐야씨의 권유를 거절했으면 나카지마양이 이렇게 불편해 할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니요, 이건 다 아버지때문……”
“그래도 죄송합니다.”
“푸....푸흡”
이 남자. 내가 화난 이유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내가 화난 이유를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생각해 나에게 사과하고 있다.
“왜 웃으세요?”
내가 웃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바보스럽다. 엉뚱하다. 그래도 이런 남자는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스크라이어씨의 모습이 아니라서요”
“헤에?, 나카지마양이 생각하는 제 모습이 뭐죠?”
“이지적인 지식인? 집안에 먼지하나라도 용서 안할 것 같은 완벽주의자요.”
“하아? 전 전혀 그런 쪽과는 거리가 먼데요. 먼지하나는커녕 먼지더미 책장을 즐겁게 열어요.”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당황스러운 듯이 말했다.
“쿠쿡. 그건 지금 보니까 알겠어요.”
아깐 저녁노을에 묻혀 안보였지만 아까부터 본 그의 옷은 정장이지만 와이셔츠는 구겨져있고 끝 단추는 너덜너덜했으며 넥타이는 반쯤 풀려있다. 분명 일하다가 시간이 되서 어딘가 쑤셔 논 정장을 입고 왔을 거다.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네요.”
이 뒤로 대화가 오가면서 맨 처음에 흘렀던 딱딱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마치 친구처럼 대화했다. 약간은 푼수같지만 기본적으론 좋은 얼굴 때문에 그 날 헤어지고 나서도 부담 없이 계속 만나 대화를 즐기거나 놀러가기도 했다. 물론 그가 좋아서 만나는 건 아니다. 단순히 친구. 친구의 느낌을 가지고 만나는 거다. 유노 스크라이어라는 인간은 한 개인으로서는 어떻지 모르지만 남자친구로서는 실격이니까. 이유를 들자면
칼퇴근 직장이 아니라 만나기로 한 약속의 절반 이상이 펑크
데이트 약속을 펑크내서 화내는 게 아니다. 사람이 공적인 약속은 무리를 해서라도 칼 같이 지키면서 사적인 약속은 그렇게 쉽게 깰 수 있냐고!
어렵사리 나온 날에는 후줄근한 복장
스바루가 “언니, 왜 그렇게 화장에 기합이 들어갔어?”라고 말 할 정도의 화장과 코디를 해갔더니 그런 복장이어서 화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사람이 편해도 정도가 있지!!
대화는 거의 고고학이나 서고 일이 대부분.
도대체 왜 데이트까지 나와서 남자 일 얘기를 들어야 하냐고! 거기다 이야기가 너무 어렵다. 나도 관리국원이 되기 위해 시험을 쳤던 만큼 역사공부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 남자 말은 너무 어렵다. 가끔 대구를 해주면 더욱더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 덕분에 요즘 관리국원 시험 볼 때 보다 2배는 많은 고고학 책을 읽고 있다.
도대체가 이런 남자를 누가 남자친구로 삼겠냐고!
정말 최악의 남자. 아니 최악 중 최악. worst of worst! 뭐, 가끔 보여주는 매너있는 모습이라던지 여성스러운 선에서 보여지는 남자다운 얼굴에 두근거리긴 하지만.
하던 생각을 접고 세면대에서 나와 화장대 앞에 선다. 그가 오랜만에 정기휴일이라 오늘은 하루종일 시내를 다녀보기로 했다. 빨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르릉 따르릉
집에 있는 전화가 올린다. 촌스러운 벨소리지만 아버지가 저 소리를 좋아하시고 나나 동생도 딱히 불만은 없다. 급히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보세요”
“저기 나카지마양?”
“이 집엔 나카지마양이 둘입니다. 그리고 저번엔 다음부터는 긴가라고 부르기로 약속했잖아요. 스크라이어씨!”
“그건. 긴가양도 마찬가지잖아.”
“그 양자도 좀 빼주면 좋겠는 데요. 유노씨”
“아니 이건 최후의 보루같은 느낌이어서 빼기가 좀 그렇거든.”
정말 이 남자는…
“그럼 계~속 양자 붙이세요. 근데 무슨 볼일이죠? 약속시간은 몇 시간 더 남았잖아요.”
“아니, 그게…, 저…”
이 자신 없는 목소리, 어딘가 미안한 분위기는.
“또 추가업무인가요.”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어쩔 수 없죠. 그럼 다음에 만나죠.”
“정말 미안해! 그럼 일이 밀려서 이만 전화 끊을게”
정말 이 남자. 새벽엔 남의 정신세계에 들어와 사람을 심란하게 하더니 아침에는 약속까지 깨? 우울했던 기분이 더욱더 우울해진다.
“스바루. 일어나~!”
문을 박차고 들어간 스바루의 방. 침대 한 가운데서 바보 동생은 한쪽 발로 이불을 걷어차고 옷은 말아 올라가 배는 다 내밀어져 있고 가슴둔덕이 보일랑 말랑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거기다가 내밀어진 배를 무의적으로 긁고 있는 모습에 입에선 침까지 흐르고 있다. 빠직. 순간 모습이 어딘가의 사서장과 겹친다.
“으응? 언니.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빨리 일어나 씻고 옷 입어!”
한쪽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일으킨 다음. 세면대로 끌고 간다.
“우앗! 언니 뭐야?”
“넌 오늘 하루 내 짐꾼이야!”
“뭐?”
“빨리 세면실로 들어갓!”
“까앗!”
문 앞에서 버티던 동생을 발로 밀어 넣는다. 조금 심한 것 같지만 휴일이라고 늦잠자는 여동생에게 훈계를 내리는 거다. 결코 그 남자랑 겹쳐서 그런게 아니라고!
“언니, 너무해.”
시내 한 가운데 스바루는 온 몸에 쇼핑백을 걸친 채 불평을 했다.
“그러게 누가 늦잠자래?”
“도대체, 늦잠하고 짐꾼하고 무슨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없지.
“상관있으니까. 앞으로 짐꾼 되기 싫으면 일찍 일어나라고”
“알았어.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평소에 안 사던 물건까지 막 사는 거야?”
“그건 니가 알 필요가…… 어라?”
스바루 건너편 멀리 익숙한 남자 얼굴이 보인다.
“언니 왜 그래?”
동생을 밀치고 그 남자가 보인 쪽으로 달려간다. 분명히 그 남자는!
“언니 어디가!”
그 남자가 골목길로 들어가자 따라 들어간다. 골목에 들어가자 반대쪽으로 나가는 남자를 보았다. 골목 사이를 지나자 내가 본 것은.
유노 스크라이어와 타카마치 나노하였다.
추가 업무가 있는 게 아니었어? 왜 저 여자랑 있는 거지? 왜 저렇게 즐거운 표정을 짓는 거야? 또 손은 왜 잡고 있는 거야! 나도 몇 일전에 겨우 잡았는데! 순간 관리국에 퍼져있는 소문이 떠오른다. 관리국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와 사서장이 소꿉친구라던가. 사서장의 목숨의 은인이 타카마치 나노하라던가. 무한서고에 들어오기 전엔 두 사람이 둘도 없는 파트너였다 라던가. 그리고 믿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연인관계다’라는 소문.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두 사람이 수상한 관계라는 걸 나도 느끼게 된다. 보고 싶지 않다. 멀리서 들리는 저 둘의 웃음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언니, 나 두고 가면 어떻게!”
스바루가 헐레벌떡 달려와 어께를 치며 말을 건다.
“가자.”
“으응?”
“가자고!”
아까 달려온 반대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언니, 쇼핑 끝인 거야? 그럼 빨리 가자!”
내 기분을 눈치 못 챘는지 바보동생은 뒤따라온다.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여기서 뭐라고 말했다간 어딘가 터질 것같다. 빨리. 빨리 집에 가지 않으면…
“언니,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야?”
집으로 돌아와 사온 케이크를 먹고 있는 나에게 스바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직 반의반도 못 먹었어.”
내 앞에 쌓여있는 케이크 접시만 50접시. 아직 성이 차지 않았다.
“언니, 오늘 새벽에 무슨 특훈이라도 한거야? 평소에 그 정도 먹으면 만족하잖아?”
새벽. 꿈. 그 남자. 시내에서의 모습. 스바루의 말에 순차적으로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픽하고 뭔가 끊어졌다.
“그래. 특훈했다. 쇼핑특훈!, 그러니까 어서 니 방으로 들어갓~!”
“아…알았어”
기가 질렸는지 스바루는 얌전히 방으로 들어간다. 실수했다. 그래도 지금은 케이크 먹는 거에 열중하고 싶다. 동생 사과할 기분이 아니다. 무언가에 열중하지 않으면, 열중하지 않으면, 울어버릴 것같다.
뭐야 나도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 남자도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아니면 양다리? 아까 나노하 씨하고 있을 땐 평소 나랑 만날 때와는 달리 말끔한 옷이었다. 뭐야 그럼 난 양다리도 못되는 그저 그런 유희거리? 그냥 대화하기 편해서 만난거야?
“아”
케이크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뚝뚝. 생크림 위로 떨어지는 눈물로 케이크 모양이 엉망이 되간다. 마치, 마치 내 마음처럼.
“나갔다 올게”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인사를 한 채 다 떨어진 케이크를 더 사오기 위해 근처 케이크 가게로 향한다. 아까 먹다가 울어서 그런 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눈이 붓고 얼굴에 눈물자국이 보이지만 그래도 케이크가 더 먹고 싶었기에 가게로 향한다. 밖에 나오니 조금만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다. 점심 때 돌아왔으니까 오후 내내 울면서 케이크를 먹은 건가. 아직도 배는 안 찼지만.
“어라? 긴가양!”
가는 도중에 그 남자가 앞에서 나를 불렀다.
“여긴, 어…어떻게”
나노하 대위랑 데이크가 벌써 끝났나?
“할 일도 끝나서 긴가양한테 사과할 겸 케이크 사가지고 가는 길이었지.”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다는 건가.
“긴가양 좋아하는 케이크를 몰라서 대충 사왔는 데. 쇼트케이크 좋아해?”
유노씨의 질문을 무시한 채 뒤를 돌아 달린다.
“긴가양? 긴가양!”
유노씨가 도망치는 나를 쫒아오는 게 느껴진다. 거짓말쟁이에 양다리 걸치는 남자에겐 잡혀줄 수 없다. 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긴가양, 그만 뛰어!”
얼마 뛰지 않아 유노씨한테 잡혀버렸다.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는데 어째서! 그래도 전 에이스 오브 에이스의 파트너였다 이건가.
“이거 놔요~!”
난 필사적으로 잡힌 손을 흔들어 구속에서 풀어나려 애섰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풀어지지 않았다.
“긴가양. 왜 도망가는 거야?”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
“긴가양. 우는 거야?”
어느새 내 얼굴엔 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안 울고 있어요”
“하지만……”
“안 울고 있다니까요”
그를 노려보자 잡고 있던 손을 놓아준다. 다시 도망가려 하자. 그가
꼬옥 나를 끌어안았다.
